생명의 말씀

종교 이야기 2014. 1. 12. 16:21

[생명의 말씀]


 


 


하느님 마음에 드는 사람


  하느님 마음에 드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오늘 이사야서의 말씀을 보면,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사람은 외치거나 목소리를 높이지 않는 조용한 사람입니다. 우리는 얼마나 시끄러운 소음 속에 세상을 살아갑니까? 저는 명동에 살고 있습니다. 명동거리는 가게마다 물건을 팔기 위해 큰소리로 노래를 틀거나 여러 가지 선전을 해대기에 지나가는 사람들은 대화조차 하기 힘듭니다. 부디 살면서 작은 소리로도 의사전달이 가능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하여 잃어버렸던 자연의 소리들을 다시 들으며 살 수 있으면 참 좋겠습니다. 빗소리, 바람 소리, 멀리서 개 짖는 소리, 풀벌레 소리, 눈이 쌓이는 소리, 꽃이 피는 소리까지…. 인간의 고함이 멈추고, 이런 소리들을 들을 수 있을 때 하느님의 소리도 함께 들릴 것입니다.


  두 번째로,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사람은 갈대가 부러졌어도 꺾어버리지 않고, 꺼져 가는 심지도 끄지 않는 그런 사람입니다. 우리 세상은 참으로 무서운 세상이 되어 버렸습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남을 이겨야 살아남는 세상, 경쟁에서 뒤지면 누구라도 노숙자가 될 수 있고 잊혀져야 하는 세상, 장애를 갖고 살아가기에 너무나 힘든 세상, 때론 가까운 사람마저도 적이 되어버리고, 빈민들에게는 아예 관심을 꺼버리고 살아가야 하는 냉혹한 세상입니다. 더불어 살아가던 삶의 여유는 어디 갔습니까? 사람은 사랑을 먹고 사는 존재이고 사랑의 대상은 결국 다른 사람들인데, 혼자 살아남는다면 사랑할 사람이 없는데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어떤 분의 시처럼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하며 살아가면 좋겠습니다. 그것이 우리가 닮아야 할 하느님의 측은지심이겠지요.


  세 번째,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사람은 지치고 기가 꺾여 용기를 잃는 일 없이 끝까지 성실하게 공정을 펴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또한 절망과 좌절의 세상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종교와 사상, 그리고 빈부의 격차 때문에 생기는 무서운 테러와 전쟁, 개발도상국들의 발전을 허락하지 않는 선진강대국들의 견제구조, 그로 인해 생기는 국가 차원의 우울증과 정신질환, 그리고 수많은 자살과 범죄들. 희망을 찾기가 참 어렵습니다. 그래도 하느님은 원하십니다. 기죽지 말고, 자살하지 말고 끝까지 성실하게 바른길을 가라고…. 개개인의 성실과 정직이 거대하고도 불의한 세상의 폭력을 끝내는 이길수 있는 길이라고 하느님은 우리를 가르치십니다.


  이렇게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사람이 되기란 참으로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 마음에 꼭 드는 사람이 한 분 계셨지요. 바로 우리의 길이 되신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이 사셨던 그 길이 이제는 우리가 걸어야 할 인생길입니다. 겸손하고 조용하지만, 연민과 정이 가득하고, 성실하고 정직하게 끝까지 걸어가는 그 인생길, 그 길이야말로 지금의 시끄럽고 혼란스러우며 무정하고도 절망스럽기까지 한 이 세상을 이기는 바로 그 길입니다.


고찬근 신부

명동대성당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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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2.14 생명의 말씀

종교 이야기 2013. 12. 15. 18:22

[생명의 말씀]


 


 


크리스마스트리를 더욱 화사하게!


  올해도 어김없이 예수님의 성탄 대축일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이맘때쯤이면 서울광장 같은 공공장소에도 웅장하고 화려한 크리스마스트리가 세워지고, ‘성탄 특수’를 노리는 상점들의 화려한 장식과 음악 소리가 사람들의 눈과 귀를 즐겁게 합니다. 그런데 “그때에 눈먼 이들은 눈이 열리고, 귀먹은 이들은 귀가 열리리라. 그때에 다리저는 이는 사슴처럼 뛰고, 말못하는 이의 혀는 환성을 터뜨리리라.”(이사 35,5-6)라는 구세주의 오심을 알리는 이사야 예언자의 말씀이 이 땅 위에서 실현되고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요?


  오늘의 복음에서는 그토록 당당하고 자신감 넘치던 세례자 요한이 약간 동요하는 듯합니다. 자신의 제자들을 보내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 아니면 저희가 다른분을 기다려야 합니까?”(마태 11,3)하고 묻습니다. 예수님 시대에는 사람들이 메시아에 대해 매우 큰 기대를 갖고 있었습니다. 그분이 오시면 로마제국의 지배에서 벗어나 강성한 왕국이 세워지고, 그 왕국에서는 모든 불의가 사라지고 풍요로운 삶이 보장되며, 이스라엘 백성은 주위의 모든 민족으로부터 부러움을 사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기대에 비하면 예수님의 행적들이 미미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 눈먼 사람을 보게 해주시고(마태 9), 다리저는 이들은 제대로 걸을 수 있게 해 주시며(마태 15, 요한 5), 나병 환자들을 깨끗하게 해 주시고(루카 17) 귀먹은 이들을 듣게 해 주시며(마르 7) 죽은 사람을 되살아나게 해 주셨지만(마태 8), 이런 혜택을 누린 이들은 극소수에 불과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세례자 요한의 의혹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에게 “눈먼 이들이 보고 다리저는 이들이 제대로 걸으며, 나병 환자들이 깨끗해지고 귀먹은 이들이 들으며, 죽은 이들이 되살아나고 가난한 이들이 복음을 듣는다.”(마태 11,5)라고 담담하게 말씀하십니다. 복음에는 예수님의 응답에 대한 세례자 요한의 반응이 없지만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마태 11,11)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에 미루어 요한은 주님에 대한 의혹을 떨쳐버렸을 것이 분명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어서 우리가 마음에 깊이 새기고 묵상해야 할 말씀을 하십니다. “하늘 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이라도 그(세례자 요한)보다 더 크다.”(마태 11,11) 우리는 예수님을 알아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예수님처럼 하늘나라의 작은 표지들을 세상에 보여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루아침에 세상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지만, ‘가난한 이’들에 대한 관심과 배려 그리고 실질적인 도움을 통해 하늘 나라의 작은 표지들을 보여줄 수 있습니다. 이 작은 표지들이 반짝이는 작은 별들이 되어 올해 성탄에 세우게 될 크리스마스트리를 더욱 화려하게 장식할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해 봅니다.


김영국 요셉 신부

학교법인 가톨릭학원 사무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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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10월 27일 생명의 말씀

종교 이야기 2013. 10. 26. 18:24
[생명의 말씀]

 

 

하늘나라는 겸손한 사람들이 들어간다

  어느 겨울날 한 추기경님이 로마거리를 걷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길 건너편에서 허리가 구부정하고 남루한 옷을 걸친 한 노인이 터덜터덜 걸어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추기경님은 노인의 모습이 측은하여 말을 건넸습니다. “어르신, 이 추운 겨울에 어디를 가십니까?” 그러자 그 노인은 “예, 추기경님! 저는 건축학교에 가는 길입니다. 배울 것이 아직도 많은데 저에게 시간이 없네요.”라고 대답을 한 노인은 당대 최고의 예술가였던 미켈란젤로였습니다.

  자신만이 최고이며 세상의 중심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교만입니다. 교만한 마음은 자신의 발전을 막고 인간관계뿐 아니라 하느님과의 관계도 파멸로 이끕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죄의 원인 중 하나로 ‘교만’을 꼽습니다. 겸손은 자신이 가치 없는 존재이거나 구원받지 못할 죄인이라고 단죄하는 것이 아닙니다. 소화 데레사 성녀는 “겸손은 진리입니다.”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즉, 우리 인간은 하느님이 아니며 피조물에 불과하다는 것, 이 미약함이 우리의 현실임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겸손한 사람은 진정한 마음의 평화를 누립니다. 고통과 힘든 현실까지도 하느님께 봉헌하며 남의 이목이나 가치판단 따위에 자신을 맡기지 않기 때문입니다. 겸손한 사람에게 유일한 안내자는 바로 하느님이십니다. 그래서 겸손은 인내심을 길러주고, 자신의 부족함을 깨달아 다른 사람에게 관대하고 여유를 갖게 합니다. 따라서 겸손한 사람은 기도를 더욱 쉽게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와 세리의 기도를 비유로 말씀하십니다. 비유에는 의인으로 자처하는 바리사이와 공적 죄인으로 멸시당하는 세리가 등장합니다. 사실 겉으로 드러난 삶에서 두 사람은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바리사이는 자신들이 완벽하게 산다고 확신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세리는 입에 하느님의 기도를 담기도 죄스러운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겸손하게 기도하는 세리가 하느님의 마음에 들었다고 단언하십니다. 반면에 예수님은 바리사이의 교만을 지적합니다. 그는 남들의 결점이나 잘못을 들추어내고 비방합니다. 자신은 다른 이와 질적으로 다르다고 자부합니다. 그의 기도는 하느님께 드리는 영광이 아니라, 교만스런 자기 자랑에 불과한 것입니다.

  세상에는 나 말고도 올바르게 사는 사람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자신의 의견이, 자신의 생각만이 옳다고 착각해서는 안 됩니다. 눈에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닙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속을 보십니다. 우리 인간은 모두 하느님 앞에 죄인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완벽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겸손하고 순수한 마음을 간직하고 살아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구원받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우리의 행업이 아니라 하느님의 은총입니다. 구원을 이루시는 분은 전적으로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모든 사람들을 차별 없이 사랑하시고 죄인들에게도 자비심을 갖고 계십니다. 하느님은 죄인이 죽기를 바라지 않으시고 살아서 회개하기를 바라십니다.

허영엽 마티아 신부
교구장 비서실 수석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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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독서와 복음

종교 이야기 2012. 7. 8. 09:21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대축일 경축(목요일) 이동

문득 이런 생각이 듭니다. 우리가 말하는 흔히 '예수천국 불신지옥'을 외치시는 분들의 근거..? 그렇지만 악법도 아닌 법을 어겨가며, 종교의 자유를 무시한채 강압적인 방식으로 엉터리 교회를 전파하여오히려 세상을 어지럽히는 것은 주님의 뜻을 위배하는 것이 아닐지...

<너희는> ▥ 역대기 하권의 말씀입니다. 24,18-22 그 무렵 요아스 임금과 유다의 대신들은 18 주 저희 조상들의 하느 님의 집을 저버리고, 아세라 목상과 다른 우상들을 섬겼다. 이 죄 때문에 유다와 예루살렘에 진노가 내렸다. 19 주님께서는 그들을 당신께 돌아오게 하시려고 그들에게 예언자들을 보내셨다. 이 예언 자들이 그들을 거슬러 증언하였지만, 그들은 귀를 기울이지 않았 다. 20 그때에 여호야다 사제의 아들 즈카르야가 하느님의 영에 사로 잡혀, 백성 앞에 나서서 말하였다.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 니다. ‘너희는 어찌하여 주님의 계명을 어기느냐? 그렇게 해서는 너희가 잘될 리 없다. 너희가 주님을 저버렸으니 주님도 너희를 저 버렸다.’” 21 그러나 사람들은 그를 거슬러 음모를 꾸미고, 임금의 명령에 따 라 주님의 집 뜰에서 그에게 돌을 던져 죽였다. 22 요아스 임금은 이렇게 즈카르야의 아버지 여호야다가 자기에게 바친 충성을 기억 하지 않고, 그의 아들을 죽였다. 즈카르야는 죽으면서, “주님께서 보고 갚으실 것이다.” 하고 말하였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너희는>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0,17-22 그때에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말씀하셨다. 17 “사람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이 너희를 의회에 넘기고 회당에서 채찍질할 것이다. 18 또 너희는 나 때문에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 그들과 다른 민족들에게 증언할 것이다. 19 사람들이 너 희를 넘길 때, 어떻게 말할까,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너희 가 무엇을 말해야 할지, 그때에 너희에게 일러 주실 것이다. 20 사 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 21 형제가 형제를 넘겨 죽게 하고 아버지가 자식을 그렇게 하며, 자식들도 부모를 거슬러 일어나 죽게 할 것이다. 22 그리고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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