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12.14 생명의 말씀

종교 이야기 2013. 12. 15. 18:22

[생명의 말씀]


 


 


크리스마스트리를 더욱 화사하게!


  올해도 어김없이 예수님의 성탄 대축일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이맘때쯤이면 서울광장 같은 공공장소에도 웅장하고 화려한 크리스마스트리가 세워지고, ‘성탄 특수’를 노리는 상점들의 화려한 장식과 음악 소리가 사람들의 눈과 귀를 즐겁게 합니다. 그런데 “그때에 눈먼 이들은 눈이 열리고, 귀먹은 이들은 귀가 열리리라. 그때에 다리저는 이는 사슴처럼 뛰고, 말못하는 이의 혀는 환성을 터뜨리리라.”(이사 35,5-6)라는 구세주의 오심을 알리는 이사야 예언자의 말씀이 이 땅 위에서 실현되고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요?


  오늘의 복음에서는 그토록 당당하고 자신감 넘치던 세례자 요한이 약간 동요하는 듯합니다. 자신의 제자들을 보내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 아니면 저희가 다른분을 기다려야 합니까?”(마태 11,3)하고 묻습니다. 예수님 시대에는 사람들이 메시아에 대해 매우 큰 기대를 갖고 있었습니다. 그분이 오시면 로마제국의 지배에서 벗어나 강성한 왕국이 세워지고, 그 왕국에서는 모든 불의가 사라지고 풍요로운 삶이 보장되며, 이스라엘 백성은 주위의 모든 민족으로부터 부러움을 사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기대에 비하면 예수님의 행적들이 미미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 눈먼 사람을 보게 해주시고(마태 9), 다리저는 이들은 제대로 걸을 수 있게 해 주시며(마태 15, 요한 5), 나병 환자들을 깨끗하게 해 주시고(루카 17) 귀먹은 이들을 듣게 해 주시며(마르 7) 죽은 사람을 되살아나게 해 주셨지만(마태 8), 이런 혜택을 누린 이들은 극소수에 불과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세례자 요한의 의혹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에게 “눈먼 이들이 보고 다리저는 이들이 제대로 걸으며, 나병 환자들이 깨끗해지고 귀먹은 이들이 들으며, 죽은 이들이 되살아나고 가난한 이들이 복음을 듣는다.”(마태 11,5)라고 담담하게 말씀하십니다. 복음에는 예수님의 응답에 대한 세례자 요한의 반응이 없지만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마태 11,11)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에 미루어 요한은 주님에 대한 의혹을 떨쳐버렸을 것이 분명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어서 우리가 마음에 깊이 새기고 묵상해야 할 말씀을 하십니다. “하늘 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이라도 그(세례자 요한)보다 더 크다.”(마태 11,11) 우리는 예수님을 알아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예수님처럼 하늘나라의 작은 표지들을 세상에 보여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루아침에 세상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지만, ‘가난한 이’들에 대한 관심과 배려 그리고 실질적인 도움을 통해 하늘 나라의 작은 표지들을 보여줄 수 있습니다. 이 작은 표지들이 반짝이는 작은 별들이 되어 올해 성탄에 세우게 될 크리스마스트리를 더욱 화려하게 장식할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해 봅니다.


김영국 요셉 신부

학교법인 가톨릭학원 사무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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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10월 27일 생명의 말씀

종교 이야기 2013. 10. 26. 18:24
[생명의 말씀]

 

 

하늘나라는 겸손한 사람들이 들어간다

  어느 겨울날 한 추기경님이 로마거리를 걷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길 건너편에서 허리가 구부정하고 남루한 옷을 걸친 한 노인이 터덜터덜 걸어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추기경님은 노인의 모습이 측은하여 말을 건넸습니다. “어르신, 이 추운 겨울에 어디를 가십니까?” 그러자 그 노인은 “예, 추기경님! 저는 건축학교에 가는 길입니다. 배울 것이 아직도 많은데 저에게 시간이 없네요.”라고 대답을 한 노인은 당대 최고의 예술가였던 미켈란젤로였습니다.

  자신만이 최고이며 세상의 중심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교만입니다. 교만한 마음은 자신의 발전을 막고 인간관계뿐 아니라 하느님과의 관계도 파멸로 이끕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죄의 원인 중 하나로 ‘교만’을 꼽습니다. 겸손은 자신이 가치 없는 존재이거나 구원받지 못할 죄인이라고 단죄하는 것이 아닙니다. 소화 데레사 성녀는 “겸손은 진리입니다.”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즉, 우리 인간은 하느님이 아니며 피조물에 불과하다는 것, 이 미약함이 우리의 현실임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겸손한 사람은 진정한 마음의 평화를 누립니다. 고통과 힘든 현실까지도 하느님께 봉헌하며 남의 이목이나 가치판단 따위에 자신을 맡기지 않기 때문입니다. 겸손한 사람에게 유일한 안내자는 바로 하느님이십니다. 그래서 겸손은 인내심을 길러주고, 자신의 부족함을 깨달아 다른 사람에게 관대하고 여유를 갖게 합니다. 따라서 겸손한 사람은 기도를 더욱 쉽게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와 세리의 기도를 비유로 말씀하십니다. 비유에는 의인으로 자처하는 바리사이와 공적 죄인으로 멸시당하는 세리가 등장합니다. 사실 겉으로 드러난 삶에서 두 사람은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바리사이는 자신들이 완벽하게 산다고 확신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세리는 입에 하느님의 기도를 담기도 죄스러운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겸손하게 기도하는 세리가 하느님의 마음에 들었다고 단언하십니다. 반면에 예수님은 바리사이의 교만을 지적합니다. 그는 남들의 결점이나 잘못을 들추어내고 비방합니다. 자신은 다른 이와 질적으로 다르다고 자부합니다. 그의 기도는 하느님께 드리는 영광이 아니라, 교만스런 자기 자랑에 불과한 것입니다.

  세상에는 나 말고도 올바르게 사는 사람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자신의 의견이, 자신의 생각만이 옳다고 착각해서는 안 됩니다. 눈에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닙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속을 보십니다. 우리 인간은 모두 하느님 앞에 죄인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완벽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겸손하고 순수한 마음을 간직하고 살아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구원받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우리의 행업이 아니라 하느님의 은총입니다. 구원을 이루시는 분은 전적으로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모든 사람들을 차별 없이 사랑하시고 죄인들에게도 자비심을 갖고 계십니다. 하느님은 죄인이 죽기를 바라지 않으시고 살아서 회개하기를 바라십니다.

허영엽 마티아 신부
교구장 비서실 수석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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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10. 20. 생명의 말씀

종교 이야기 2013. 10. 20. 18:22
[생명의 말씀]

 

 

친구야, 함께 놀자!

  어린시절의 추억들 가운데에는 간혹 잘 보존된 사진처럼 생생하게 기억되는 일이 있습니다. 저는 초등학교 시절 복사단 활동을 열심히 했습니다. 그땐 정말 성당 다니는 것이 신이 나고 즐거운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때만큼 ‘선교의 열정’(?)이 강했던 적도 없었던 것 같습니다. 동네 친구들을 종종 성당에 데리고 가곤 했는데, 이럴 때면 시합 때의 김연아 선수처럼, 성당 마당에 있는 성모상 앞에서 보란 듯이 성호를 긋고 오른 무릎을 꿇는 등 과장된 행동도 하곤 하였습니다. 그 친구들에게 성당이 얼마나 재미있고 즐거운 곳인지를 알리고 싶었고, 또 성당에서 함께 놀고 싶었던 것입니다.

  베네딕토 16세 교황님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선포 50주년을 맞이하여 ‘신앙의 해’를 선포하면서, 공의회의 근본취지를 기억하며 신앙의 참된 의미를 재확인하고 그 기쁨을 이웃들과 함께 나누자고 권고하였습니다.

  오늘은 ‘신앙의 해’의 막바지에 맞이하는 전교주일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도 전교주일을 맞이하여 같은 취지의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단순히 복지기관이나 NGO(비정부민간단체)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만남으로써 얻게 되는 구원의 기쁨을 이웃들에게 전하는 이들의 공동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선교란 특정한 사람들에게 주어진 일이 아니라, 교회 구성원 모두가 신앙으로부터 우러나오는 내면의 기쁨을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이웃들과 함께 나누는 행위입니다. ‘본성상 선교하는 교회’(「가톨릭교회교리서」 850항)라는 말은 바로 이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세상을 떠나시기에 앞서 당신 복음선포의 출발지인 갈릴래아로 제자들을 부르시어 당부의 말씀을 남기십니다.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마태 28,19-20)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라는 말씀은 왠지 딱딱한 교리처럼 들리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느님은 성령 안에서 아버지와 아들이 사랑으로 하나가 되는 신비이기 때문에,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사람들은 누구나 하느님의 아들과 딸이 되어 사랑의 가족공동체를 이루어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 사실을 널리 알리라는 당부입니다.

  ‘성당에 다니는 것’은 단순히 삶의 지혜나 마음의 안식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느님을 모시고 하나의 커다란 가족을 이루어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40)라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이 가족 안에서 도움을 필요로 하는 형제자매들은 더욱 특별한 배려와 사랑을 받을 수 있습니다.

  ‘친구야, 함께 놀자!’하는 마음으로 이웃에게 이 기쁜 소식을 전해야 합니다.

김영국 요셉 신부
학교법인 가톨릭학원 사무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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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 부활] 오늘의 말씀

종교 이야기 2012. 4. 8. 09:00
주일 학교 교리 시간에 선생님이 어린이들에게 물었습니다. “천국에 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그러자 한 어린이가 손을 들더니, “선생님, 천 국에 가려면 먼저 죽어야 합니다.” 하고 대답했답니다. 이 말을 곰곰이 생각해 보면 맞는 말입니다. 천국에 가려면 죽어야 합니다. 우리는 이기심 을 죽이고, 욕심을 죽이고, 미움을 죽일 때 천국에 갈 수 있습니다. 부활은 사랑이 미움을, 용서가 증오를, 평화가 폭력을 이긴다는 것을 보여 준 사건입니다. 빛은 암흑에 지배되지 않습니다. 거짓과 위선이 진실을 이길 수 없습니다. 폭력이 예수님을 무덤에 가둘 수는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미움과 증오 앞에서 사랑과 용서로 당신을 죽이셨습니다. 이기심 과 거짓 앞에서 이타심과 진리로 당신을 죽이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자신을 죽인 그 자리에 부활의 싹을 틔우셨습니다. 부활은 건너감입니다.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감입니다. 향락과 재물을 섬기는 삶에서 하느님을 섬기는 사람으로 건너감입니다. 자신만을 위하는 이기적인 사람에서 나누고 베푸는 사람으로, 미워하고 증오하던 마음에서 용서하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건너감입니다. 이 건너감의 끝에서 만날 수 있는 것이 부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0,1-9 <또는 마르 16,1-7 또는 저녁 미사에서는 루카 24,13-35> 1 주간 첫날 이른 아침, 아직도 어두울 때에 마리아 막달레나가 무덤에 가서 보니, 무덤을 막았던 돌이 치워져 있었다. 2 그래서 그 여자는 시몬 베드로와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서 말하였다. “누가 주님을 무덤에서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 3 베드로와 다른 제자는 밖으로 나와 무덤으로 갔다. 4 두 사람이 함께 달렸는데,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빨리 달려 무덤에 먼저 다다랐다. 5 그 는 몸을 굽혀 아마포가 놓여 있는 것을 보기는 하였지만, 안으로 들어가지는 않았다. 6 시몬 베드로가 뒤따라와서 무덤으로 들어가 아마포가 놓여 있는 것을 보았다. 7 예수님의 얼굴을 쌌던 수건은 아마포와 함께 놓여 있지 않고, 따 로 한곳에 개켜져 있었다. 8 그제야 무덤에 먼저 다다른 다른 제자도 들어갔다. 그리고 보고 믿었다. 9 사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 에서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는 성경 말씀을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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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종교 이야기 2012. 3. 30. 20:20

예수님을 둘러싼 논쟁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유다인들은 예수님을 죽이겠다고 결심하고 그 구실을 찾으려고 안간힘을 씁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죽 일 수 있는 방법은 예수님께서 하느님을 모독했다는 증거를 찾는 것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 죄목에 맞는 뚜렷한 증거를 찾지 못하였습니 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의 입에서 “나는 메시아다.”라는 말이 나오도록 유도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실패하자 그들은 다른 방법을 찾습니 다. 이제 그들은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라는 예수님 말씀을 두고 따집니다. 종교적 전통과 율법에 사로잡힌 유다인들은 자신들이 생각한 대로 모든 일이 진행되어야만 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 편에 있지 않으면 다 틀렸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심지어 하느님에 대한 믿음에서도 그러한 잣대를 들이댑니다. 그릇된 신념이나 편견과 고집으로 꽉 찬 사람들처럼 무서운 것은 없습니다. 그들은 전쟁까지도 일으킵니다. 폭력과 살상을 해서라도 자신들의 신 념과 종교를 지키겠다는 것입니다. 내 신념이나 주관이 늘 옳은 것은 아닙니다. 그것을 올바로 점검해 주실 수 있는 분은 예수님 한 분뿐이십니다.


<유다인들이 예수님을 잡으려고 하였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손을 벗어나셨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0,31-42 그때에 31 유다인들이 돌을 집어 예수님께 던지려고 하였다. 32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아 버지의 분부에 따라 너희에게 좋은 일을 많이 보여 주었다. 그 가운데에서 어떤 일로 나에게 돌을 던지려고 하 느냐?” 33 유다인들이 예수님께, “좋은 일을 하였기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을 모독하였기 때문에 당신에게 돌을 던지 려는 것이오. 당신은 사람이면서 하느님으로 자처하고 있소.” 하고 대답하자, 34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 하셨다. “너희 율법에 ‘내가 이르건대 너희는 신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지 않으냐? 35 폐기될 수 없는 성경에 서, 하느님의 말씀을 받은 이들을 신이라고 하였는데, 36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시어 이 세상에 보내신 내가 ‘나는 하느님의 아들이다.’ 하였다 해서, ‘당신은 하느님을 모독하고 있소.’ 하고 말할 수 있느냐? 37 내가 내 아버지의 일들을 하고 있지 않다면 나를 믿지 않아도 좋다. 38 그러나 내가 그 일들을 하고 있다면, 나를 믿지 않더라도 그 일들은 믿어라. 그러면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는 것을 너희가 깨달아 알게 될 것이다.” 39 그러자 유다인들이 다시 예수님을 잡으려고 하였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손을 벗어나셨다. 40 예수님 께서는 다시 요르단 강 건너편, 요한이 전에 세례를 주던 곳으로 물러가시어 그곳에 머무르셨다. 41 그러자 많은 사람이 그분께 몰려와 서로 말하였다. “요한은 표징을 하나도 일으키지 않았지만, 그가 저분 에 관하여 한 말은 모두 사실이었다.” 42 그곳에서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믿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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