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말씀

종교 이야기 2014. 1. 12. 16:21

[생명의 말씀]


 


 


하느님 마음에 드는 사람


  하느님 마음에 드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오늘 이사야서의 말씀을 보면,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사람은 외치거나 목소리를 높이지 않는 조용한 사람입니다. 우리는 얼마나 시끄러운 소음 속에 세상을 살아갑니까? 저는 명동에 살고 있습니다. 명동거리는 가게마다 물건을 팔기 위해 큰소리로 노래를 틀거나 여러 가지 선전을 해대기에 지나가는 사람들은 대화조차 하기 힘듭니다. 부디 살면서 작은 소리로도 의사전달이 가능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하여 잃어버렸던 자연의 소리들을 다시 들으며 살 수 있으면 참 좋겠습니다. 빗소리, 바람 소리, 멀리서 개 짖는 소리, 풀벌레 소리, 눈이 쌓이는 소리, 꽃이 피는 소리까지…. 인간의 고함이 멈추고, 이런 소리들을 들을 수 있을 때 하느님의 소리도 함께 들릴 것입니다.


  두 번째로,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사람은 갈대가 부러졌어도 꺾어버리지 않고, 꺼져 가는 심지도 끄지 않는 그런 사람입니다. 우리 세상은 참으로 무서운 세상이 되어 버렸습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남을 이겨야 살아남는 세상, 경쟁에서 뒤지면 누구라도 노숙자가 될 수 있고 잊혀져야 하는 세상, 장애를 갖고 살아가기에 너무나 힘든 세상, 때론 가까운 사람마저도 적이 되어버리고, 빈민들에게는 아예 관심을 꺼버리고 살아가야 하는 냉혹한 세상입니다. 더불어 살아가던 삶의 여유는 어디 갔습니까? 사람은 사랑을 먹고 사는 존재이고 사랑의 대상은 결국 다른 사람들인데, 혼자 살아남는다면 사랑할 사람이 없는데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어떤 분의 시처럼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하며 살아가면 좋겠습니다. 그것이 우리가 닮아야 할 하느님의 측은지심이겠지요.


  세 번째,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사람은 지치고 기가 꺾여 용기를 잃는 일 없이 끝까지 성실하게 공정을 펴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또한 절망과 좌절의 세상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종교와 사상, 그리고 빈부의 격차 때문에 생기는 무서운 테러와 전쟁, 개발도상국들의 발전을 허락하지 않는 선진강대국들의 견제구조, 그로 인해 생기는 국가 차원의 우울증과 정신질환, 그리고 수많은 자살과 범죄들. 희망을 찾기가 참 어렵습니다. 그래도 하느님은 원하십니다. 기죽지 말고, 자살하지 말고 끝까지 성실하게 바른길을 가라고…. 개개인의 성실과 정직이 거대하고도 불의한 세상의 폭력을 끝내는 이길수 있는 길이라고 하느님은 우리를 가르치십니다.


  이렇게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사람이 되기란 참으로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 마음에 꼭 드는 사람이 한 분 계셨지요. 바로 우리의 길이 되신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이 사셨던 그 길이 이제는 우리가 걸어야 할 인생길입니다. 겸손하고 조용하지만, 연민과 정이 가득하고, 성실하고 정직하게 끝까지 걸어가는 그 인생길, 그 길이야말로 지금의 시끄럽고 혼란스러우며 무정하고도 절망스럽기까지 한 이 세상을 이기는 바로 그 길입니다.


고찬근 신부

명동대성당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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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erman Nazi = Japanese militarism

종교 이야기 2014. 1. 4. 17:09


I found the movie, 'Escape from Sobibor (1987)', today.


The movie was my first time to learn about German Nazi and Jewish Camp when I was 8 years old.

Next was TV series 'War and Peace'.


Right now, Japanese Prime Minister Abe is praying for World War 2 war criminals (Yasukuni).

It is not a Prayer of forgiveness, like German Prime Minister did. They are celebrating what they did in the past.


They are still using the symbol of the Japanese militarism, like symbol of the Nazi.


We (Asian) don't understand what happened between 'German, and Jewish' or 'German, and any other European countries'.


But, think more!!! It is the same situation!!!


Many Japanese said "History is history".

But they never paid us back. Even never say sorry.


They are still fixing their history textbook.


They keep smiling in front of US and keep hiding their crimes behind.


Japanese drive stake to deny comfort women (young little Sex Slaves by Asian countr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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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2.14 생명의 말씀

종교 이야기 2013. 12. 15. 18:22

[생명의 말씀]


 


 


크리스마스트리를 더욱 화사하게!


  올해도 어김없이 예수님의 성탄 대축일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이맘때쯤이면 서울광장 같은 공공장소에도 웅장하고 화려한 크리스마스트리가 세워지고, ‘성탄 특수’를 노리는 상점들의 화려한 장식과 음악 소리가 사람들의 눈과 귀를 즐겁게 합니다. 그런데 “그때에 눈먼 이들은 눈이 열리고, 귀먹은 이들은 귀가 열리리라. 그때에 다리저는 이는 사슴처럼 뛰고, 말못하는 이의 혀는 환성을 터뜨리리라.”(이사 35,5-6)라는 구세주의 오심을 알리는 이사야 예언자의 말씀이 이 땅 위에서 실현되고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요?


  오늘의 복음에서는 그토록 당당하고 자신감 넘치던 세례자 요한이 약간 동요하는 듯합니다. 자신의 제자들을 보내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 아니면 저희가 다른분을 기다려야 합니까?”(마태 11,3)하고 묻습니다. 예수님 시대에는 사람들이 메시아에 대해 매우 큰 기대를 갖고 있었습니다. 그분이 오시면 로마제국의 지배에서 벗어나 강성한 왕국이 세워지고, 그 왕국에서는 모든 불의가 사라지고 풍요로운 삶이 보장되며, 이스라엘 백성은 주위의 모든 민족으로부터 부러움을 사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기대에 비하면 예수님의 행적들이 미미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 눈먼 사람을 보게 해주시고(마태 9), 다리저는 이들은 제대로 걸을 수 있게 해 주시며(마태 15, 요한 5), 나병 환자들을 깨끗하게 해 주시고(루카 17) 귀먹은 이들을 듣게 해 주시며(마르 7) 죽은 사람을 되살아나게 해 주셨지만(마태 8), 이런 혜택을 누린 이들은 극소수에 불과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세례자 요한의 의혹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에게 “눈먼 이들이 보고 다리저는 이들이 제대로 걸으며, 나병 환자들이 깨끗해지고 귀먹은 이들이 들으며, 죽은 이들이 되살아나고 가난한 이들이 복음을 듣는다.”(마태 11,5)라고 담담하게 말씀하십니다. 복음에는 예수님의 응답에 대한 세례자 요한의 반응이 없지만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마태 11,11)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에 미루어 요한은 주님에 대한 의혹을 떨쳐버렸을 것이 분명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어서 우리가 마음에 깊이 새기고 묵상해야 할 말씀을 하십니다. “하늘 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이라도 그(세례자 요한)보다 더 크다.”(마태 11,11) 우리는 예수님을 알아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예수님처럼 하늘나라의 작은 표지들을 세상에 보여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루아침에 세상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지만, ‘가난한 이’들에 대한 관심과 배려 그리고 실질적인 도움을 통해 하늘 나라의 작은 표지들을 보여줄 수 있습니다. 이 작은 표지들이 반짝이는 작은 별들이 되어 올해 성탄에 세우게 될 크리스마스트리를 더욱 화려하게 장식할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해 봅니다.


김영국 요셉 신부

학교법인 가톨릭학원 사무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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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 신자가 점을 보러가도 되나요?

종교 이야기 2013. 11. 3. 18:19
[가톨릭교회교리서 해설-1]

 

 

“천주교 신자가 점(占)보러 가도 되나요?”

  올해도 변함없이 대입 수능시험이 다가옵니다. 시험 앞에 학생들의 얼굴은 날이 갈수록 초췌해지고, 수험생을 둔 부모는 불안과 초조함으로 덩달아 긴장합니다. 자식이 잘된다면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을 만큼 부모의 마음은 간절합니다. 하지만 천주교 신자가 자녀의 입학이나 성공을 위해 점을 보러 가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일까요?

  성경은 시련과 도전 앞에서 우리가 택해야 할 길을 분명히 보여 줍니다. 그 길은 우리보다 앞서 걸어간 신앙인의 발자취를 따르며 그들의 믿음을 본받는 것입니다. 구약시대, 하란에 정착하여 살던 아브라함에게 하느님의 말씀이 내립니다. “네 고향과 친족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너에게 보여 줄 땅으로 가거라.”(창세 12,1) 그는 안정된 삶의 터전인 고향과 아버지를 떠나라는 말에 근심이 밀려오고, 알지도 못하는 곳으로 가라는 말에 불안감은 커져만 갔을 것입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이 말씀을 듣고 순종함으로써 믿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성모님은 더욱 놀라운 믿음을 우리에게 보여주십니다. 하느님께서 보내신 천사의 말, 처녀의 몸으로 잉태하리라는 말을 듣고 과연 누가 이를 따를 수 있겠습니까? 더욱이 당시에는 처녀가 임신하면 돌에 맞아 죽을 수 있는데도 말입니다. 성모님도 처음에는 몹시 놀랐습니다. 그러나 성모님은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라고 대답하며 믿음의 극치를 보여주십니다.

  미래에 대한 걱정과 불안은 우리 앞에 언제나 어둠처럼 드리워지지만 그것이 인간을 지배해서는 안 됩니다. “올바른 그리스도인의 태도는 미래와 관련된 모든 것을 신뢰심을 가지고 하느님의 섭리의 손길에 맡겨드리고 이에 대한 불건전한 호기심을 완전히 버리는 것입니다.”(가톨릭교회교리서 2115항) 하느님의 섭리에 대한 믿음은 생명에 대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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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10월 27일 생명의 말씀

종교 이야기 2013. 10. 26. 18:24
[생명의 말씀]

 

 

하늘나라는 겸손한 사람들이 들어간다

  어느 겨울날 한 추기경님이 로마거리를 걷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길 건너편에서 허리가 구부정하고 남루한 옷을 걸친 한 노인이 터덜터덜 걸어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추기경님은 노인의 모습이 측은하여 말을 건넸습니다. “어르신, 이 추운 겨울에 어디를 가십니까?” 그러자 그 노인은 “예, 추기경님! 저는 건축학교에 가는 길입니다. 배울 것이 아직도 많은데 저에게 시간이 없네요.”라고 대답을 한 노인은 당대 최고의 예술가였던 미켈란젤로였습니다.

  자신만이 최고이며 세상의 중심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교만입니다. 교만한 마음은 자신의 발전을 막고 인간관계뿐 아니라 하느님과의 관계도 파멸로 이끕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죄의 원인 중 하나로 ‘교만’을 꼽습니다. 겸손은 자신이 가치 없는 존재이거나 구원받지 못할 죄인이라고 단죄하는 것이 아닙니다. 소화 데레사 성녀는 “겸손은 진리입니다.”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즉, 우리 인간은 하느님이 아니며 피조물에 불과하다는 것, 이 미약함이 우리의 현실임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겸손한 사람은 진정한 마음의 평화를 누립니다. 고통과 힘든 현실까지도 하느님께 봉헌하며 남의 이목이나 가치판단 따위에 자신을 맡기지 않기 때문입니다. 겸손한 사람에게 유일한 안내자는 바로 하느님이십니다. 그래서 겸손은 인내심을 길러주고, 자신의 부족함을 깨달아 다른 사람에게 관대하고 여유를 갖게 합니다. 따라서 겸손한 사람은 기도를 더욱 쉽게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와 세리의 기도를 비유로 말씀하십니다. 비유에는 의인으로 자처하는 바리사이와 공적 죄인으로 멸시당하는 세리가 등장합니다. 사실 겉으로 드러난 삶에서 두 사람은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바리사이는 자신들이 완벽하게 산다고 확신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세리는 입에 하느님의 기도를 담기도 죄스러운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겸손하게 기도하는 세리가 하느님의 마음에 들었다고 단언하십니다. 반면에 예수님은 바리사이의 교만을 지적합니다. 그는 남들의 결점이나 잘못을 들추어내고 비방합니다. 자신은 다른 이와 질적으로 다르다고 자부합니다. 그의 기도는 하느님께 드리는 영광이 아니라, 교만스런 자기 자랑에 불과한 것입니다.

  세상에는 나 말고도 올바르게 사는 사람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자신의 의견이, 자신의 생각만이 옳다고 착각해서는 안 됩니다. 눈에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닙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속을 보십니다. 우리 인간은 모두 하느님 앞에 죄인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완벽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겸손하고 순수한 마음을 간직하고 살아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구원받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우리의 행업이 아니라 하느님의 은총입니다. 구원을 이루시는 분은 전적으로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모든 사람들을 차별 없이 사랑하시고 죄인들에게도 자비심을 갖고 계십니다. 하느님은 죄인이 죽기를 바라지 않으시고 살아서 회개하기를 바라십니다.

허영엽 마티아 신부
교구장 비서실 수석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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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10. 20. 생명의 말씀

종교 이야기 2013. 10. 20. 18:22
[생명의 말씀]

 

 

친구야, 함께 놀자!

  어린시절의 추억들 가운데에는 간혹 잘 보존된 사진처럼 생생하게 기억되는 일이 있습니다. 저는 초등학교 시절 복사단 활동을 열심히 했습니다. 그땐 정말 성당 다니는 것이 신이 나고 즐거운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때만큼 ‘선교의 열정’(?)이 강했던 적도 없었던 것 같습니다. 동네 친구들을 종종 성당에 데리고 가곤 했는데, 이럴 때면 시합 때의 김연아 선수처럼, 성당 마당에 있는 성모상 앞에서 보란 듯이 성호를 긋고 오른 무릎을 꿇는 등 과장된 행동도 하곤 하였습니다. 그 친구들에게 성당이 얼마나 재미있고 즐거운 곳인지를 알리고 싶었고, 또 성당에서 함께 놀고 싶었던 것입니다.

  베네딕토 16세 교황님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선포 50주년을 맞이하여 ‘신앙의 해’를 선포하면서, 공의회의 근본취지를 기억하며 신앙의 참된 의미를 재확인하고 그 기쁨을 이웃들과 함께 나누자고 권고하였습니다.

  오늘은 ‘신앙의 해’의 막바지에 맞이하는 전교주일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도 전교주일을 맞이하여 같은 취지의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단순히 복지기관이나 NGO(비정부민간단체)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만남으로써 얻게 되는 구원의 기쁨을 이웃들에게 전하는 이들의 공동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선교란 특정한 사람들에게 주어진 일이 아니라, 교회 구성원 모두가 신앙으로부터 우러나오는 내면의 기쁨을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이웃들과 함께 나누는 행위입니다. ‘본성상 선교하는 교회’(「가톨릭교회교리서」 850항)라는 말은 바로 이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세상을 떠나시기에 앞서 당신 복음선포의 출발지인 갈릴래아로 제자들을 부르시어 당부의 말씀을 남기십니다.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마태 28,19-20)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라는 말씀은 왠지 딱딱한 교리처럼 들리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느님은 성령 안에서 아버지와 아들이 사랑으로 하나가 되는 신비이기 때문에,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사람들은 누구나 하느님의 아들과 딸이 되어 사랑의 가족공동체를 이루어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 사실을 널리 알리라는 당부입니다.

  ‘성당에 다니는 것’은 단순히 삶의 지혜나 마음의 안식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느님을 모시고 하나의 커다란 가족을 이루어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40)라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이 가족 안에서 도움을 필요로 하는 형제자매들은 더욱 특별한 배려와 사랑을 받을 수 있습니다.

  ‘친구야, 함께 놀자!’하는 마음으로 이웃에게 이 기쁜 소식을 전해야 합니다.

김영국 요셉 신부
학교법인 가톨릭학원 사무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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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타와 마리아의 화해

종교 이야기 2013. 7. 21. 09:14

 

 

 

[생명의 말씀]

마르타와 마리아의 화해

  재미삼아 사람의 성격과 혈액형을 연결지어 볼까요. 예를 들면, 언니가 바쁘던 말던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던 마리아는 자기만의 세상에 빠져 사는 AB형에 가깝지 않았을까요? 씩씩하게 팔을 걷어 붙이고 음식을 준비하며, 주님에게 거침없이 자기 의견을 말씀드리던 마르타는 소심한 A형은 아니었겠지요?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루카 10,41-42)

   마르타도, 마리아도 주님을 사랑합니다. 마르타는 맛있는 음식에 자신의 사랑을 담으려 했고, 마리아는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임으로써 자신의 사랑을 표현했습니다. 그런데 음식을 준비하느라 정신없이 바빴던 마르타의 경우에는 수단(음식)과 목적(사랑)이 슬그머니 뒤바뀌어 버립니다. 음식 만드는 일이 최종 목적이 되는 순간, 동생이 얄미워지고 주님도 원망스럽습니다.

  마르타와 마리아의 이야기는 옛날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의 이야기입니다. 현대 사회는 일을 두려워하지 않는 적극적인 사람들을 선호합니다. 성과와 실적이 중요한 평가 기준이 되기에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시키려 최선을 다해 일합니다. 집에서 자녀를 키우고 가사를 책임지는 사람들도 직장에서의 근무 못지않게 일에 쫓겨 살아갑니다. 그래서 저녁이 되면 녹초가 되어 기도할 시간은커녕 자신을 돌아볼 시간조차 없습니다. 가족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하는 일인데 이런 생활이 지속되다 보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가족들에게 섭섭한 마음을 갖기도 하고, 때로는 미워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일에 쫓겨 사는 사회는 말 그대로 ‘피로사회’입니다.

  건강한 삶은 외적인 활동과 내면으로의 집중이 조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그리스도 신자들에게 가장 필요한 일은 마리아처럼 주님의 말씀을 경청함으로써 삶의 시선을 주님께 고정시키는 일입니다. 자신이 누구인지, 무엇을 하는지, 왜 하는지에 대한 내면의 돌아봄 없이, 외적인 성과나 성공만을 추구하다보면 위험한 상황에 빠질 수 있습니다. 지난 수십 년 동안 초고속으로 경제성장을 이룬 대한민국의 40대 사망률이 세계적으로 가장 높은 이유도 이런 사실과 무관하지 않을 듯합니다.

  오늘은 농민주일입니다. 갈수록 어려워지는 농업환경 속에서 묵묵히 소중한 땀을 흘리며 우리의 먹거리를 장만하시는 분들을 기억하고 특별히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농부이신 하느님 아버지”(요한 15,1 참조)의 사랑을 믿고 “땅의 귀한 소출을 참고 기다리는”(야고 5,7 참조) 농민의 마음가짐이 오늘 복음의 메시지와도 통합니다. 농민들은 농사가 인간의 외적인 활동과 노력만으로 이루어지지 않고, 하느님의 축복과 섭리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온몸으로 체험하는 분들이기 때문입니다.

  마르타의 사랑방법과 마리아의 사랑방법이 우리 안에서 조화를 이루었으면 합니다.

김영국 요셉 신부
학교법인 가톨릭학원 사무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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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량품

종교 이야기 2013. 6. 23. 11:46
나는 불량품입니다
자주 삐걱거리고 멈추고 흔들립니다
 
그런데도
나를 안아주는 가정이 있고
나를 좋아하는 친구들이 있고
나를 받아주는 직장이 있습니다
 
그들은 나를 불량품이 아니라 명품이라 부릅니다
그들은 나를 자랑하고 기뻐하며 소중히 여깁니다
불량품인데도 내가 이렇게 당당한 것은
그들의 사랑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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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을 따르는 길은 십자가의 길

종교 이야기 2013. 6. 23. 11:16
[생명의 말씀]

 

 

주님을 따르는 길은 십자가의 길

  세례를 받은 지 일 년 정도 지난 신자들의 피정모임이 있었습니다. 생활 나눔 중 어느 신자 분이 들려준 이야기입니다.

  “저는 처음에 세례성사를 받고 신자가 되면 세상의 모든 고통과 어려움이 없어질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아니 없어지지 않더라도 적어도 가벼워질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오히려 그 반대였습니다. 하느님을 믿는 것이 때로는 그전보다 내 삶을 더 고통스럽고 힘들게 만들었습니다. 특히 과거에는 의식도 못하고 지나갔던 행동들이 심한 죄책감으로 느껴지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그 모든 것이 하느님의 은총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제가 느끼는 만큼 죄를 조심하게 되었고, 신앙의 삶이 어려워도 마음의 기쁨과 평화를 느낄 수 있습니다. 왜 신앙의 길이 십자가의 길인지 조금은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루카 9,23)

  예수님은 오늘 복음에서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자신을 버린다는 것은 자신을 비하하거나 혐오하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자신의 삶을 선택하는 자기 결단이며, 삶의 실현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데 마지막 걸림돌은 바로 ‘나 자신’입니다. 재물이나 명예를 버리기도 목숨처럼 아깝지만, 나 자신을 버린다는 것은 더욱 어렵습니다. 이웃 사랑을 실천하고 봉사활동에 열심히 한다 하더라도 나 자신을 버리지 못한다면 자기만족이나, 위선된 행동이 될 수도 있습니다. 나 자신의 욕심이나 집착 등은 어쩌면 가장 극복하기 힘든 삶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늘 선택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선택은 늘 하느님과 나 사이에서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자신을 버리라고 단호하게 말씀하신 것이 아닐까요.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자신을 포기해야 합니다. 결국 주님을 위해 자기를 버린다는 것은 자신의 삶에서 주님의 뜻을 우선시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자유의지로 하느님의 뜻을 따르고 실천하겠다는 다짐입니다. 따라서 주님을 따르는 것 자체가 이미 십자가를 각오한 셈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매일의 삶 속에서 구현해야하는 그리스도인들의 지침도 주십니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것이다.” (루카 9,24) 하느님의 뜻을 따르면 결국 나 자신에게 이익이 됩니다. 그러나 그전에 세상 속에서 고통과 수난의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인간의 눈에는 당장 어리석게 보일지라도 하느님의 뜻을 위해 자신을 버리는 행위가 결국 생명에 이르는 길이 됩니다.

  누군가 나에게 “당신은 왜 어리석은 바보처럼 십자가를 지고 갑니까?”라고 물으면 대답합시다. “나를 너무 사랑하셔서 나를 위해 죽기까지 하신 예수님에 대한 나의 믿음 때문입니다.”이라고 말입니다.

허영엽 마티아 신부
교구장 비서실 수석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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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4/14. 생명의 말씀

종교 이야기 2013. 4. 14. 09:25
[생명의 말씀]

 

 

발현하신 예수님 알아보기

  그리스도교 영성생활에는 ‘수덕생활’과 ‘신비생활’이 있습니다. 그중에서 수덕생활의 수덕은 닦을 ‘수(修)’와 덕 '덕(德)’으로 이루어져 글자 그대로 ‘덕을 닦는다’ 즉 ‘덕행에 정진한다’는 뜻입니다. 이 단어의 어원인 그리스말에는 ‘운동선수가 반복해서 훈련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는데, 그 단어를 그리스도교에서 덕행을 수련하는 일에 적용하여 사용하였던 것입니다. 국위를 선양하고 있는 운동선수들은 개인적인 일들을 참아가며 매일 열심히 반복
훈련을 하였기 때문에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도 완덕을 이루어 하느님을 만나는 체험을 하기 원한다면, 먼저 나태해지는 자신을 극복하고 매일 열심히 덕을 닦아야만 하느님의 은총으로 신비생활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만약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앞에 나타나신다면, 그분이 예수님이시라는 것을 어떻게 알아볼 수 있겠습니까? 2001년 봄 BBC 방송국에서는 ‘신의 아들’이라는 다큐멘터리를 제작발표하면서 예수님의 얼굴로 추정하는 그림을 함께 발표하였습니다. 1세기경 이스라엘 사람들의 유골 자료를 수집하여 평균값으로 작성한 얼굴은 예술가들의 상상에 의해 그려진 유럽사람의 모습과는 확연히 달랐습니다. 과학자들은 이 모습이 실재 예수님의 얼굴에 더 가까울 수 있다고 했지만 우리는 그 얼굴을 가지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확인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복음서들이 전해주는 부활하신 예수님의 발현 이야기에 흥미로운 점이 한가지 있습니다. 평소에 예수님과 가깝게 지냈던 사람들이 발현하신 예수님을 얼른 알아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무덤이 비어있는 것을 보고 슬퍼하던 마리아 막달레나는 발현하신 예수님을 정원지기로 여기다가, “마리아야!”라고 부르시는 목소리를 듣고서야 예수님을 알아보게 됩니다.(요한 20,11-18 참조)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도 한나절을 함께 걷던 분이 예수님이신 줄 모르다가, 저녁 식탁에서 예수님께서 빵을 들어 찬미를 드리신 다음 떼어 나누어 주실 때에 비로소 예수님을 알아보게 됩니다.(루카 24,13-35 참조) 오늘 복음에서도 제자들은 물가에 서 계시는 분이 예수님이신 줄 모르다가, 배 오른쪽으로 그물을 던지라는 말씀을 듣고서야 예수님을 알아보게 됩니다.

  뒤늦게나마 제자들이 예수님을 알아보게 되는 시점은 예수님과 함께했던 친숙한 시간의 기억을 떠올리는 순간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과 공유하는 기억을 통해서 예수님을 알아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도 사도들은 유다 종교지도자들의 억압에도 굴하지 않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끊임없이 퍼뜨림으로써 예수님과의 추억을 잊지 않으려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우리 가운데 현존하시는 예수님을 알아보기 위해서는 반복하여 실천하는 수덕생활을 통하여 예수님과 공유하는 소중한 추억을 많이 쌓을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은총으로 신비생활에 참여한 우리는 영적인 눈이 열려 예수님을 올바로 알아볼 수 있을 것입니다.

전영준 바오로 신부
가톨릭대학교 성신교정 교수

 

 

 

 

 

 
예전부터 의문인 부분이었다. 그렇게 따르던 예수를 알아보지 못한다는건, 다른사람이 거짓으로 부활을 알리려고 꾸민 짓이라고 밖에...

오늘에서야 진심은 마음가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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