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말씀

종교 이야기 2014. 1. 12. 16:21

[생명의 말씀]


 


 


하느님 마음에 드는 사람


  하느님 마음에 드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오늘 이사야서의 말씀을 보면,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사람은 외치거나 목소리를 높이지 않는 조용한 사람입니다. 우리는 얼마나 시끄러운 소음 속에 세상을 살아갑니까? 저는 명동에 살고 있습니다. 명동거리는 가게마다 물건을 팔기 위해 큰소리로 노래를 틀거나 여러 가지 선전을 해대기에 지나가는 사람들은 대화조차 하기 힘듭니다. 부디 살면서 작은 소리로도 의사전달이 가능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하여 잃어버렸던 자연의 소리들을 다시 들으며 살 수 있으면 참 좋겠습니다. 빗소리, 바람 소리, 멀리서 개 짖는 소리, 풀벌레 소리, 눈이 쌓이는 소리, 꽃이 피는 소리까지…. 인간의 고함이 멈추고, 이런 소리들을 들을 수 있을 때 하느님의 소리도 함께 들릴 것입니다.


  두 번째로,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사람은 갈대가 부러졌어도 꺾어버리지 않고, 꺼져 가는 심지도 끄지 않는 그런 사람입니다. 우리 세상은 참으로 무서운 세상이 되어 버렸습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남을 이겨야 살아남는 세상, 경쟁에서 뒤지면 누구라도 노숙자가 될 수 있고 잊혀져야 하는 세상, 장애를 갖고 살아가기에 너무나 힘든 세상, 때론 가까운 사람마저도 적이 되어버리고, 빈민들에게는 아예 관심을 꺼버리고 살아가야 하는 냉혹한 세상입니다. 더불어 살아가던 삶의 여유는 어디 갔습니까? 사람은 사랑을 먹고 사는 존재이고 사랑의 대상은 결국 다른 사람들인데, 혼자 살아남는다면 사랑할 사람이 없는데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어떤 분의 시처럼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하며 살아가면 좋겠습니다. 그것이 우리가 닮아야 할 하느님의 측은지심이겠지요.


  세 번째,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사람은 지치고 기가 꺾여 용기를 잃는 일 없이 끝까지 성실하게 공정을 펴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또한 절망과 좌절의 세상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종교와 사상, 그리고 빈부의 격차 때문에 생기는 무서운 테러와 전쟁, 개발도상국들의 발전을 허락하지 않는 선진강대국들의 견제구조, 그로 인해 생기는 국가 차원의 우울증과 정신질환, 그리고 수많은 자살과 범죄들. 희망을 찾기가 참 어렵습니다. 그래도 하느님은 원하십니다. 기죽지 말고, 자살하지 말고 끝까지 성실하게 바른길을 가라고…. 개개인의 성실과 정직이 거대하고도 불의한 세상의 폭력을 끝내는 이길수 있는 길이라고 하느님은 우리를 가르치십니다.


  이렇게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사람이 되기란 참으로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 마음에 꼭 드는 사람이 한 분 계셨지요. 바로 우리의 길이 되신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이 사셨던 그 길이 이제는 우리가 걸어야 할 인생길입니다. 겸손하고 조용하지만, 연민과 정이 가득하고, 성실하고 정직하게 끝까지 걸어가는 그 인생길, 그 길이야말로 지금의 시끄럽고 혼란스러우며 무정하고도 절망스럽기까지 한 이 세상을 이기는 바로 그 길입니다.


고찬근 신부

명동대성당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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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2.14 생명의 말씀

종교 이야기 2013. 12. 15. 18:22

[생명의 말씀]


 


 


크리스마스트리를 더욱 화사하게!


  올해도 어김없이 예수님의 성탄 대축일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이맘때쯤이면 서울광장 같은 공공장소에도 웅장하고 화려한 크리스마스트리가 세워지고, ‘성탄 특수’를 노리는 상점들의 화려한 장식과 음악 소리가 사람들의 눈과 귀를 즐겁게 합니다. 그런데 “그때에 눈먼 이들은 눈이 열리고, 귀먹은 이들은 귀가 열리리라. 그때에 다리저는 이는 사슴처럼 뛰고, 말못하는 이의 혀는 환성을 터뜨리리라.”(이사 35,5-6)라는 구세주의 오심을 알리는 이사야 예언자의 말씀이 이 땅 위에서 실현되고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요?


  오늘의 복음에서는 그토록 당당하고 자신감 넘치던 세례자 요한이 약간 동요하는 듯합니다. 자신의 제자들을 보내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 아니면 저희가 다른분을 기다려야 합니까?”(마태 11,3)하고 묻습니다. 예수님 시대에는 사람들이 메시아에 대해 매우 큰 기대를 갖고 있었습니다. 그분이 오시면 로마제국의 지배에서 벗어나 강성한 왕국이 세워지고, 그 왕국에서는 모든 불의가 사라지고 풍요로운 삶이 보장되며, 이스라엘 백성은 주위의 모든 민족으로부터 부러움을 사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기대에 비하면 예수님의 행적들이 미미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 눈먼 사람을 보게 해주시고(마태 9), 다리저는 이들은 제대로 걸을 수 있게 해 주시며(마태 15, 요한 5), 나병 환자들을 깨끗하게 해 주시고(루카 17) 귀먹은 이들을 듣게 해 주시며(마르 7) 죽은 사람을 되살아나게 해 주셨지만(마태 8), 이런 혜택을 누린 이들은 극소수에 불과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세례자 요한의 의혹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에게 “눈먼 이들이 보고 다리저는 이들이 제대로 걸으며, 나병 환자들이 깨끗해지고 귀먹은 이들이 들으며, 죽은 이들이 되살아나고 가난한 이들이 복음을 듣는다.”(마태 11,5)라고 담담하게 말씀하십니다. 복음에는 예수님의 응답에 대한 세례자 요한의 반응이 없지만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마태 11,11)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에 미루어 요한은 주님에 대한 의혹을 떨쳐버렸을 것이 분명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어서 우리가 마음에 깊이 새기고 묵상해야 할 말씀을 하십니다. “하늘 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이라도 그(세례자 요한)보다 더 크다.”(마태 11,11) 우리는 예수님을 알아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예수님처럼 하늘나라의 작은 표지들을 세상에 보여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루아침에 세상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지만, ‘가난한 이’들에 대한 관심과 배려 그리고 실질적인 도움을 통해 하늘 나라의 작은 표지들을 보여줄 수 있습니다. 이 작은 표지들이 반짝이는 작은 별들이 되어 올해 성탄에 세우게 될 크리스마스트리를 더욱 화려하게 장식할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해 봅니다.


김영국 요셉 신부

학교법인 가톨릭학원 사무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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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10월 27일 생명의 말씀

종교 이야기 2013. 10. 26. 18:24
[생명의 말씀]

 

 

하늘나라는 겸손한 사람들이 들어간다

  어느 겨울날 한 추기경님이 로마거리를 걷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길 건너편에서 허리가 구부정하고 남루한 옷을 걸친 한 노인이 터덜터덜 걸어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추기경님은 노인의 모습이 측은하여 말을 건넸습니다. “어르신, 이 추운 겨울에 어디를 가십니까?” 그러자 그 노인은 “예, 추기경님! 저는 건축학교에 가는 길입니다. 배울 것이 아직도 많은데 저에게 시간이 없네요.”라고 대답을 한 노인은 당대 최고의 예술가였던 미켈란젤로였습니다.

  자신만이 최고이며 세상의 중심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교만입니다. 교만한 마음은 자신의 발전을 막고 인간관계뿐 아니라 하느님과의 관계도 파멸로 이끕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죄의 원인 중 하나로 ‘교만’을 꼽습니다. 겸손은 자신이 가치 없는 존재이거나 구원받지 못할 죄인이라고 단죄하는 것이 아닙니다. 소화 데레사 성녀는 “겸손은 진리입니다.”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즉, 우리 인간은 하느님이 아니며 피조물에 불과하다는 것, 이 미약함이 우리의 현실임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겸손한 사람은 진정한 마음의 평화를 누립니다. 고통과 힘든 현실까지도 하느님께 봉헌하며 남의 이목이나 가치판단 따위에 자신을 맡기지 않기 때문입니다. 겸손한 사람에게 유일한 안내자는 바로 하느님이십니다. 그래서 겸손은 인내심을 길러주고, 자신의 부족함을 깨달아 다른 사람에게 관대하고 여유를 갖게 합니다. 따라서 겸손한 사람은 기도를 더욱 쉽게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와 세리의 기도를 비유로 말씀하십니다. 비유에는 의인으로 자처하는 바리사이와 공적 죄인으로 멸시당하는 세리가 등장합니다. 사실 겉으로 드러난 삶에서 두 사람은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바리사이는 자신들이 완벽하게 산다고 확신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세리는 입에 하느님의 기도를 담기도 죄스러운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겸손하게 기도하는 세리가 하느님의 마음에 들었다고 단언하십니다. 반면에 예수님은 바리사이의 교만을 지적합니다. 그는 남들의 결점이나 잘못을 들추어내고 비방합니다. 자신은 다른 이와 질적으로 다르다고 자부합니다. 그의 기도는 하느님께 드리는 영광이 아니라, 교만스런 자기 자랑에 불과한 것입니다.

  세상에는 나 말고도 올바르게 사는 사람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자신의 의견이, 자신의 생각만이 옳다고 착각해서는 안 됩니다. 눈에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닙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속을 보십니다. 우리 인간은 모두 하느님 앞에 죄인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완벽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겸손하고 순수한 마음을 간직하고 살아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구원받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우리의 행업이 아니라 하느님의 은총입니다. 구원을 이루시는 분은 전적으로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모든 사람들을 차별 없이 사랑하시고 죄인들에게도 자비심을 갖고 계십니다. 하느님은 죄인이 죽기를 바라지 않으시고 살아서 회개하기를 바라십니다.

허영엽 마티아 신부
교구장 비서실 수석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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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10. 20. 생명의 말씀

종교 이야기 2013. 10. 20. 18:22
[생명의 말씀]

 

 

친구야, 함께 놀자!

  어린시절의 추억들 가운데에는 간혹 잘 보존된 사진처럼 생생하게 기억되는 일이 있습니다. 저는 초등학교 시절 복사단 활동을 열심히 했습니다. 그땐 정말 성당 다니는 것이 신이 나고 즐거운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때만큼 ‘선교의 열정’(?)이 강했던 적도 없었던 것 같습니다. 동네 친구들을 종종 성당에 데리고 가곤 했는데, 이럴 때면 시합 때의 김연아 선수처럼, 성당 마당에 있는 성모상 앞에서 보란 듯이 성호를 긋고 오른 무릎을 꿇는 등 과장된 행동도 하곤 하였습니다. 그 친구들에게 성당이 얼마나 재미있고 즐거운 곳인지를 알리고 싶었고, 또 성당에서 함께 놀고 싶었던 것입니다.

  베네딕토 16세 교황님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선포 50주년을 맞이하여 ‘신앙의 해’를 선포하면서, 공의회의 근본취지를 기억하며 신앙의 참된 의미를 재확인하고 그 기쁨을 이웃들과 함께 나누자고 권고하였습니다.

  오늘은 ‘신앙의 해’의 막바지에 맞이하는 전교주일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도 전교주일을 맞이하여 같은 취지의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단순히 복지기관이나 NGO(비정부민간단체)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만남으로써 얻게 되는 구원의 기쁨을 이웃들에게 전하는 이들의 공동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선교란 특정한 사람들에게 주어진 일이 아니라, 교회 구성원 모두가 신앙으로부터 우러나오는 내면의 기쁨을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이웃들과 함께 나누는 행위입니다. ‘본성상 선교하는 교회’(「가톨릭교회교리서」 850항)라는 말은 바로 이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세상을 떠나시기에 앞서 당신 복음선포의 출발지인 갈릴래아로 제자들을 부르시어 당부의 말씀을 남기십니다.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마태 28,19-20)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라는 말씀은 왠지 딱딱한 교리처럼 들리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느님은 성령 안에서 아버지와 아들이 사랑으로 하나가 되는 신비이기 때문에,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사람들은 누구나 하느님의 아들과 딸이 되어 사랑의 가족공동체를 이루어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 사실을 널리 알리라는 당부입니다.

  ‘성당에 다니는 것’은 단순히 삶의 지혜나 마음의 안식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느님을 모시고 하나의 커다란 가족을 이루어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40)라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이 가족 안에서 도움을 필요로 하는 형제자매들은 더욱 특별한 배려와 사랑을 받을 수 있습니다.

  ‘친구야, 함께 놀자!’하는 마음으로 이웃에게 이 기쁜 소식을 전해야 합니다.

김영국 요셉 신부
학교법인 가톨릭학원 사무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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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독서와 복음

종교 이야기 2012. 7. 8. 09:21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대축일 경축(목요일) 이동

문득 이런 생각이 듭니다. 우리가 말하는 흔히 '예수천국 불신지옥'을 외치시는 분들의 근거..? 그렇지만 악법도 아닌 법을 어겨가며, 종교의 자유를 무시한채 강압적인 방식으로 엉터리 교회를 전파하여오히려 세상을 어지럽히는 것은 주님의 뜻을 위배하는 것이 아닐지...

<너희는> ▥ 역대기 하권의 말씀입니다. 24,18-22 그 무렵 요아스 임금과 유다의 대신들은 18 주 저희 조상들의 하느 님의 집을 저버리고, 아세라 목상과 다른 우상들을 섬겼다. 이 죄 때문에 유다와 예루살렘에 진노가 내렸다. 19 주님께서는 그들을 당신께 돌아오게 하시려고 그들에게 예언자들을 보내셨다. 이 예언 자들이 그들을 거슬러 증언하였지만, 그들은 귀를 기울이지 않았 다. 20 그때에 여호야다 사제의 아들 즈카르야가 하느님의 영에 사로 잡혀, 백성 앞에 나서서 말하였다.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 니다. ‘너희는 어찌하여 주님의 계명을 어기느냐? 그렇게 해서는 너희가 잘될 리 없다. 너희가 주님을 저버렸으니 주님도 너희를 저 버렸다.’” 21 그러나 사람들은 그를 거슬러 음모를 꾸미고, 임금의 명령에 따 라 주님의 집 뜰에서 그에게 돌을 던져 죽였다. 22 요아스 임금은 이렇게 즈카르야의 아버지 여호야다가 자기에게 바친 충성을 기억 하지 않고, 그의 아들을 죽였다. 즈카르야는 죽으면서, “주님께서 보고 갚으실 것이다.” 하고 말하였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너희는>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0,17-22 그때에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말씀하셨다. 17 “사람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이 너희를 의회에 넘기고 회당에서 채찍질할 것이다. 18 또 너희는 나 때문에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 그들과 다른 민족들에게 증언할 것이다. 19 사람들이 너 희를 넘길 때, 어떻게 말할까,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너희 가 무엇을 말해야 할지, 그때에 너희에게 일러 주실 것이다. 20 사 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 21 형제가 형제를 넘겨 죽게 하고 아버지가 자식을 그렇게 하며, 자식들도 부모를 거슬러 일어나 죽게 할 것이다. 22 그리고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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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의 이삭 - 김태희 02

종교 이야기 2012. 6. 29. 21:28

[말씀의 이삭]

 

 

하느님의 훈육 방법

  삶 속에서 온 마음을 다해 하느님을 절실히 찾게 될 때가 있습니다. 기쁜 일이 생겨 한없이 감사를 드릴 때, 그리고 힘든 일이 생겨 마음이 너무나 괴로울 때입니다. 개인적으로 하느님 앞에 더 다가가려고 노력하게 될 때는, 역시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뭔가 큰일이 생겼을 때인 것 같습니다. 사실 살다 보면, 내가 전혀 의도하지 않았던 방향으로 일이 흘러가기도 하고, 다른 사람들의 오해를 사기도 하며, ‘내가 무슨 잘못을 했길래 지금 이런 고통을 받아야 하나?’ 하고 억울할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나에게 해를 입힌 것 같은 사람들을 미워하기도 하고, 다른 사람을 탓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하느님께서 과연 아무 이유 없이 오로지 나를 골탕먹이기 위해 이 모든 일을 벌이신 건 절대 아니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지금은 도저히 이해가 안 가고, 마냥 피하고만 싶은 일들도 분명 시간이 흐르면, 그로 인해 내가 좀 더 성숙해질 수 있게끔 하신 하느님의 지혜로운 훈육 방법이었음을 깨닫게 되리라 믿습니다. 그리고 내게 일어나는 모든 예상치 못했던 사건 하나하나가, 사실은 모두 하느님의 계획에 따라 일어나는 과정일 뿐이라고 생각하면, 그 누구에게도 원망이나 불만을 품을 수 없습니다. 오히려 나를 너무나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숨은 뜻을 알아차리기 위해 더욱 노력하면서 그분과 더 가까워지는 계기가 되기도 합니다. 어쩌면 하느님이 우리에게 바라시는 건, 우리가 늘 하느님을 잊지 않고 사는 것, 그것 하나뿐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실상 나는 지극히 개인적인 욕심을 위해 하느님께 뻔뻔하게 매달리는 기도를 많이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보잘것없고 어리석은 목소리에도, 하느님은 언제나 늘 계시던 그 자리에서 귀 기울여 들어주십니다. 수많은 선택의 갈림길에서 어느 길로 가야 할지 혼란스러울 때도, 혹은 내게 왜 이런 시련과 고난을 주시나 하고 영문을 모를 때도, 하느님께 답을 묻고 의지하면 내게 주어진 모든 상황은 더 이상 나 혼자 지고 가야 하는 짐이 아니게 됩니다.

  하느님께서 말씀하시길,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너희는 나 없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라고 하셨습니다. 내가 ‘배우’라는 직업을 갖고 ‘연기’라는 것을 하게 된 것은 정말 하느님이 주관하시지 않았으면 도저히 일어날 수 없었을 일입니다. 내가 많은 사람 앞에 나서서 뭔가를 표현하는, 연기를 하게 될 줄은 정말 자라면서 단 한 번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말이 없고 사교성이 그닥 좋지 않았던 나는, 몇몇 친한 사람들 하고만 잘 지내며 내 할 일만 성실히 하면서 살 뿐이었습니다. 그런 내게, 하느님은 연기를 하면서 다른 사람의 처지에서 살아보게 하고, 그들을 마음으로 온전히 이해해야만 하는 과제를 안겨 주셨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그 연기를 통해, 나를 설레게 하고 희열을 느끼게도 하며 풍성한 삶을 살게 해 주십니다. 또, 무엇보다도 정말 많은 팬들의 조건 없는, 아무런 대가를 바라지 않는 순수한 사랑을 내 앞에 보여주시면서 개인주의적인 나 자신을 적나라하게 되돌아보게 하십니다. 결국, 하느님이 나를 연기자로 이끄신 것은 아마도 그것을 통해 사람을 이해하고 서로 사랑하는 법을 가르쳐주시기 위함이었던 것입니다.

김태희 베르다┃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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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의 이삭- 김태희 01

종교 이야기 2012. 6. 27. 09:28
Seouljubo

[말씀의 이삭]

 

 

나는 늘 너와 함께 있다.

  처음 성당에 다니게 된 것은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입니다. 여름 방학을 이용해 남동생과 함께 교리 교육을 받고, 세례를 받아, 그렇게 첫영성체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더 어릴 때에는 조부모님의 종교가 불교였기 때문에 가끔 절에 따라다니기도 했는데, 어린 내 눈에는 왠지 모르게 성당 다니는 다른 친구들이 예쁜 미사보를 쓰고 기도하는 모습이 부럽고 멋져 보였습니다. 그런데 초등학교 5학년 때 성당의 사목회장을 맡고 계시던 담임 선생님께서 어느샌가 엄마를 인도하셨고, 그렇게 해서 나머지 가족들도 차례로 자연스럽게 성당에 다니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성당에 다니기 시작했다고 해서 곧바로 하느님의 존재를 진심으로 믿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냥 성당에 열심히 다녀야 왠지 복을 받을 것 같고, 수험생이 되어 불안할 때 어딘가 기댈 곳이 있다는 게 좋았을 따름이었습니다. 내가 자란 울산은 당시 고등학교가 비평준화였기에 중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는 고등학교 입시에 대한 경쟁과 스트레스가 만만치 않았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단순한 성격의 나는 아무 생각 없이 매주 주일 미사는 빠지지 않고 참석하며 지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게 정확히 중학교 몇 학년 때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날도 여느 때와 다름없이 걸어서 학교 가는 길이었는데 유난히 아침 햇살이 따듯하게 내리쬐고 있었습니다. 땅도 보고 하늘도 보며 걷다 불현듯 뭔가 알 수 없는 신비스런 기운에 휩싸이면서 가슴이 벅차 왔습니다. 하느님께서 ‘사랑하는 내 딸아, 내가 늘 너와 함께 있다.’ 하고 말씀하시는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항상 그 자리에 있는, 하지만 눈이 부셔 감히 쳐다볼 수도 없는 저 태양처럼, 그렇게 하느님이 나도 모르게 늘 나를 지켜봐 주시고 따듯하게 안아주시고 계셨구나 하는 황홀한 깨달음이 한순간에 온몸으로 느껴졌습니다. 그뒤로 나는 대부분의 날을 행복한 마음으로 하느님의 사랑을 마음껏 만끽하며 학교에 갈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물론, 누군가는 이런 나의 개인적인 경험이 그냥 그날의 기분 탓에 겪은 단순한 감정일 뿐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하느님이 계신다는 건,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도, 증명해 보여줄 수도 없으니까요. 하지만 난 그 이후로도, 크고 작은 놀라운 체험들을 꽤 많이 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나의 사사롭고 막무가내인 수많은 기도에 하나도 빼놓지 않고 응답해주시며 당신의 존재를 늘 내게 상기시켜 주십니다. 내가 스스로 눈을 감고 귀를 막아 하느님 말씀을 모른 척하며 살지 않는 이상, 하느님은 언제나 내 마음 깊은 곳에서 사랑이 가득 담긴 목소리로 친절하게 말씀해 주십니다. 그 많은 말씀 가운데, 유독 여러번 강조하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바로,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3.34)라는 말씀입니다. 하느님께서 보시고 흐뭇한 미소가 지어질만큼, 내가 이 말씀을 삶 속에서 실천하는 그날은 과연 언제 올 수 있을지…. 오늘도 난 하느님 앞에서 한없이 모자라고 부끄러운 나 자신을 발견합니다. 하지만 동시에 내 마음 한구석에서는 나의 근거 없는 자신감이 이렇게 속삭입니다. ‘그래도 하느님은 날 사랑하실 거야 … 영원히….’ 라고.

김태희 베르다┃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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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경석 목사의 "가톨릭과 맞장"

종교 이야기 2012. 3. 15. 16:02

서경석 목사의 "가톨릭과 맞장"


벌써 14일 전인 지난 3월 1일에 개신교 목사 서경석씨는 "가톨릭과 맞장" 이라는 말이 들어간 발언을 하였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 소위 기독교라고 불리우는 개신교목사를 앞세워 정치적인 발언을 심하게 하고 있다.

석 의 한 위 


종교와 정치가 분리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과 아닌 사람들이 있다. 가톨릭에서도 사회 교리라는  것으로 신도들의 적극적인 사회, 정치 참여를 인정하고 그 가이드를 제시하고 있다. 정치적 발언은 개인의 입장에서 가능하지만, 그것이 특정 종교의 전체인것 처럼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개신교의 목사님들, 특히 유명 목사님들이 그러한 발언을 하고 있고, 가톨릭에서는 정의구현 사제단의 촛불집회 참여가 마치 가톨릭 전체의 분위기와 주장인냥 신문에서는 떠들고 있다.

 그리고 내가 서경석 목사님의 발언에서 화가 난 것은 종교적인 측면이 강하다.


"기독교의 가장 보편적인 교회가톨릭을 전혀 다른 종교인냥 이야기한다."



가톨릭의 의미를 살펴보면, 사도신경에 나오는 '거룩한 공회를 믿사오며' 혹은 가톨릭판 '거룩하고 보편된 교회와...' 영어로 ' the holy Catholic Church'에서 시작된다. 즉, 가톨릭은 사도신경이 인정한 거룩한 교회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렇게 이야기한다면, 다시한번 개신교도로 부터 반박을 받는다. 그것은 바로 변질된 종교를 개혁하여, 진정한 교회로 변화된 것이 바로 개신교이며, 그것만이 진정한 기독교라는 것이다. 우선 마리아교라는 오해 아닌 오해는 반박하기 전에 그 부분 부터 설명을 해야 하는 것이 맞는 것같다. 앞으로 몇번의 걸친 포스팅을 통해 흔히 대한민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가톨릭교에 대한 오해와 이야기들을 이야기 해 볼까 한다.



공회 : 로마 제국 시대에, 예루살렘과 각 지방에 있던 유대 인의 의회. 주로 국민의 종교 생활을 감독하며 민사(民事) 문제도 맡아보았다.


정치적 발언을 하기 위한 블로그가 아닌 이상, 정치적인 측면은 제외했다. 가톨릭 주교회에서 제주도 기지건설을 반대하기로 공식입장을 밝혔다면, 가톨릭 신자인 나도 (그 의견을 반대할 수는 있겠지만) 따라가야 하는 공동체 의식이 강한 종교이다. 정의사제 구현단은 주교회의 공식 입장이 아니다. 그렇다고 그것은 이단도 아니다. 그부분은 글을 써가면서 이해 해 보도록 하겠다.


게그맨 서경석씨도 아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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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톨릭뉴스에 따르면 서경석 목사기독교지도자협의회와 나라와교회를바로세우기위한 국민운동본부 주관으로 지난 1일 장충체육관에서 열린 ‘기독교 범교단 단체 및 애국 단체 연합 3·1절 기념대회'에서 "여태까지 가톨릭이 반대해 왔는데, 이번에 개신교인들이 모두 나서서 결연 하게 가톨릭과 맞장을 뜨겠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좌파들이 제주도가 평화의 섬인데 거기 왜 해군기지가 있어야 하냐고 하니까 노무현 대통령이 ‘바로 그 평화를 지키기 위해 필요하다'고 했는데, 좌파들이 이걸 전부 뒤집고 백지화하려고 하고 있다"면서 "제주도에서는 지금 우파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고 좌파의 목소리만 들리고 있다"고 주장했다. 
 
 서 목사는 특히 "오는 8일 개신교인들제주도에 모인다"며 "10만원을 보조해 줄 테니 자기 돈 4만원만 내고 제주도에 같이 가자"고 개신교인들의 제주도 방문을 촉구하기도 했다. 그는 "지금까지 육지에서 제주도로 간다는 개신교인이 250명"이라며 "현지에서도 1500명이 모이겠다고 전했다"고 말했다.

 

LIM, Yang Kyu(임양규)
Audio & Interactive Media Lab
Graduate School of Culture Technology
KAIST, Korea


lim0386@gmail.com
lim0386@kaist.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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