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의 이삭 - 김래원

종교 이야기 2012. 11. 18. 09:16
[말씀의 이삭]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

  제게는 시간이 갈수록 더욱 또렷해지고 힘을 주는 어린 시절의 기억이 있습니다.

  그것은 어둑새벽에 일어나셔서 무릎을 꿇고 묵주기도를 하시던 할머니의 모습입니다.

  할머니 손에 이끌려 이른 아침 미사도 참례하고 수녀님들이 운영하는 유치원도 다녔습니다. 늘 제 머리맡에는 성경과 묵주가 놓여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초등학교 때부터 전격적으로 농구선수를 하면서 할머니와 떨어져 서울로 전학을 왔습니다. 제 머리맡에는 변함없이 성경과 묵주가 놓여 있었지만, 성당엔 다니지 않았습니다. 점차 제 마음은 하느님보다 다른 여러 가지 관심 있는 일들로 채워져 갔습니다. 중학교 3학년 때 중한 부상으로 운동을 그만두게 되었습니다. 농구선수가 되겠다는 꿈을 접고 배우가 되겠다는 생각으로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친구들이 가끔 “성당에 가자.” “교회에 가자.”라고 초대하면 저는 늘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호랑이한테 사자를 믿으라고 해라.” 그때는 모든 것이 제힘으로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지내던 중에 영화 “해바라기”의 주인공으로 출연하게 되었습니다. 연출자와 제작진, 배우들과 가족처럼 친해졌습니다. 그러나 영화를 마친 후 주인공의 아픔이 그대로 제게 남아 있었습니다. 그 아픈 마음을 감당하기가 참으로 버거웠습니다. 그 감정에서 벗어나고자 친구들과 지인들과 여행, 낚시, 운동도 했습니다. 어느 날은 친구들과 술에 취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모든 것이 의미를 잃은 듯 우울하기만 했습니다. 치료를 받아야 하지 않나 하는 걱정도 되었습니다.

  그날도 술에 취한 채 늦은 밤에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무심하게 침대 곁에 놓여 있는 성경을 펼쳤습니다. ‘술에 취하지 마라’(잠언 20,1 참조)는 구절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깜짝 놀라 성경을 덮었습니다. 며칠 후 저는 조심스럽게 성경에 손을 올리고 전에 펼친 부분에서 멀리 떨어진 부분을 펼쳤습니다. 그런데 제 눈엔 또 “술에 취하지 마십시오.”(에페 5,18)라는 구절이 확 들어왔습니다.

  그 후 저는 성경을 첫 페이지부터 읽기 시작했습니다. 외출도 하지 않고 어떤 날은 9시간 이상씩 오직 성경만 읽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족보와 전례 예식에 관련된 몇 부분을 제외하곤 하나같이 저를 위해 하시는 말씀으로 다가왔습니다. 성경의 마지막 구절을 읽었을 때 제게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제 마음을 무겁게 짓누르던 어둠은 사라지고 모든 사물이 새롭게 보이고 제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기쁨이 터져 나왔습니다.

  그때 제가 잊고 있던 할머니의 기도하시는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그리고 제가 하느님과의 끈을 놓지 않도록 제 주변에는 신앙이 깊은 친구와 지인들이 항상 있었다는 것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알았습니다. 제가 주님께 다가가기 전에 이미 그분은 저와 함께 계셨고 늘 저를 사랑해주고 계셨다는 것을, 할머니의 끊임없는 기도와 알게 모르게 기도해주신 많은 분들의 사랑이었다는 것을. 이제는 미약하지만 제 기도도 누군가가 참으로 주님을 만날 수 있는 작은 동력이 되길 바랍니다.

김래원 요셉┃배우

 

 

 

 

설정

트랙백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