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어나 비추어라

종교 이야기 2013. 1. 6. 18:56
일어나 비추어라

  ‘일어나 비추어라. 너의 빛이 왔다.’ 기원전 5세기 바빌론 유배가 풀린 후 극심한 사회적 혼란과 불안, 절망의 도가니에 빠져버린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이 말씀은 그로부터 먼먼 훗날을 살아가고 있는 제게 환한 빛으로 다가옵니다. 저를 가두고 있는 자의식의 감옥, 회의와 두려움과 불안이라는 사슬과 차꼬를 풀고 일어나 자유로워지라는 북돋움의 말씀, 타고난 대로의 생명과 자존감을 회복하라는 말씀, 어느 누구도 쓸모없는 잉여의 존재가 아니라는 말씀으로 들려옵니다.

  이 말씀을 묵상하며, 이제껏 살아오면서 나를 사랑하지 않고, 나를 인정하지 않은 죄가 얼마나 큰 것인지를 돌아봅니다. 생각해보면 참 끔찍이도 자신을 야단치고 구박해온 게 아닌가 싶습니다. 언제나 제 안팎의 과오와 어리석음, 못남들을 끝없이 되감기 해 보며 부끄러움과 분노와 실망감으로 가차 없이 비난하곤 했지요. 그래서 기도는 하릴없는 자탄으로 떨어지거나 매서운 자아비판에 지나지 않게 되곤 합니다. 때로는 그러한 것들이 저도 모르게 입 밖으로 튀어나와 길 가던 사람을 돌아보게 하거나, 영문 모르는 가족으로부터 걱정스런 물음을 듣기도 합니다. 자신을 그렇게 기술적으로 잘 괴롭혀본 사람은 다른 사람도 역시 그처럼 괴롭힐 수 있다고, 그것이 더 큰 문제라는 말들도 하지요. 자신을 향한 종주먹질에 발이 걸려 인생도 믿음도 더 나아가지 못한다는 자각은 때때로 ‘어찌 그리 매일 매 순간 네 결점을 늘어놓고 비난하면서 너와 더불어 나를 그렇게 모욕하는 것이냐. 그것은 성찰도 정직도 겸손도 아닌 자학이다. 자학은 내가 네게 준 생명 자체에 대한 부정과 모욕이기도 하다는 것을 모르느냐’ 하시는 나무람으로 들려오기도 합니다. 스웨덴의 영화감독 잉그마르 베르히만은 자폐와 자학의 해악에 대해 이렇게 말했지요.

  “자네의 골방에서 걸어나오게. 자네가 세상에 나와서 저지르는 어떤 고약한 짓도 자네가 골방에서 자신에게 가하는 어떤 짓보다도 낫다네.”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생명은 모두 신성하고 그 어느것에도 하느님의 지문이 찍혀 있다고 합니다. 또한 흙으로 빚어져 하느님의 숨결로 생명을 받은 인간은 진흙에서부터 신성에 이르는 모든 과정과 요소를 담고 있습니다. 누구나 가슴 안에 신성이 깃들었던 자리가 빈 채로, 깊은 상실감으로 남아 있어 사람들은 저마다의 갈망과 소망의 형상으로 하느님을 그리는 것이라고 합니다. 쓰는 두려움, 말하기의 두려움, 내 안을 바라보는 두려움, 상처를 입히고 입는 것에 대한 두려움, 살아가는 일에 응당 함께 할 수밖에 없는 온갖 불안과 어려움을 끌어안고 ‘일어나 비추일 것’, 그것은 하느님께서 새해 아침 제게 주시는 사랑의 과제일 것입니다.

오정희 실비아┃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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