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타와 마리아의 화해

종교 이야기 2013. 7. 21. 09:14

 

 

 

[생명의 말씀]

마르타와 마리아의 화해

  재미삼아 사람의 성격과 혈액형을 연결지어 볼까요. 예를 들면, 언니가 바쁘던 말던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던 마리아는 자기만의 세상에 빠져 사는 AB형에 가깝지 않았을까요? 씩씩하게 팔을 걷어 붙이고 음식을 준비하며, 주님에게 거침없이 자기 의견을 말씀드리던 마르타는 소심한 A형은 아니었겠지요?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루카 10,41-42)

   마르타도, 마리아도 주님을 사랑합니다. 마르타는 맛있는 음식에 자신의 사랑을 담으려 했고, 마리아는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임으로써 자신의 사랑을 표현했습니다. 그런데 음식을 준비하느라 정신없이 바빴던 마르타의 경우에는 수단(음식)과 목적(사랑)이 슬그머니 뒤바뀌어 버립니다. 음식 만드는 일이 최종 목적이 되는 순간, 동생이 얄미워지고 주님도 원망스럽습니다.

  마르타와 마리아의 이야기는 옛날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의 이야기입니다. 현대 사회는 일을 두려워하지 않는 적극적인 사람들을 선호합니다. 성과와 실적이 중요한 평가 기준이 되기에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시키려 최선을 다해 일합니다. 집에서 자녀를 키우고 가사를 책임지는 사람들도 직장에서의 근무 못지않게 일에 쫓겨 살아갑니다. 그래서 저녁이 되면 녹초가 되어 기도할 시간은커녕 자신을 돌아볼 시간조차 없습니다. 가족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하는 일인데 이런 생활이 지속되다 보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가족들에게 섭섭한 마음을 갖기도 하고, 때로는 미워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일에 쫓겨 사는 사회는 말 그대로 ‘피로사회’입니다.

  건강한 삶은 외적인 활동과 내면으로의 집중이 조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그리스도 신자들에게 가장 필요한 일은 마리아처럼 주님의 말씀을 경청함으로써 삶의 시선을 주님께 고정시키는 일입니다. 자신이 누구인지, 무엇을 하는지, 왜 하는지에 대한 내면의 돌아봄 없이, 외적인 성과나 성공만을 추구하다보면 위험한 상황에 빠질 수 있습니다. 지난 수십 년 동안 초고속으로 경제성장을 이룬 대한민국의 40대 사망률이 세계적으로 가장 높은 이유도 이런 사실과 무관하지 않을 듯합니다.

  오늘은 농민주일입니다. 갈수록 어려워지는 농업환경 속에서 묵묵히 소중한 땀을 흘리며 우리의 먹거리를 장만하시는 분들을 기억하고 특별히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농부이신 하느님 아버지”(요한 15,1 참조)의 사랑을 믿고 “땅의 귀한 소출을 참고 기다리는”(야고 5,7 참조) 농민의 마음가짐이 오늘 복음의 메시지와도 통합니다. 농민들은 농사가 인간의 외적인 활동과 노력만으로 이루어지지 않고, 하느님의 축복과 섭리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온몸으로 체험하는 분들이기 때문입니다.

  마르타의 사랑방법과 마리아의 사랑방법이 우리 안에서 조화를 이루었으면 합니다.

김영국 요셉 신부
학교법인 가톨릭학원 사무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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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량품

종교 이야기 2013. 6. 23. 11:46
나는 불량품입니다
자주 삐걱거리고 멈추고 흔들립니다
 
그런데도
나를 안아주는 가정이 있고
나를 좋아하는 친구들이 있고
나를 받아주는 직장이 있습니다
 
그들은 나를 불량품이 아니라 명품이라 부릅니다
그들은 나를 자랑하고 기뻐하며 소중히 여깁니다
불량품인데도 내가 이렇게 당당한 것은
그들의 사랑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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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을 따르는 길은 십자가의 길

종교 이야기 2013. 6. 23. 11:16
[생명의 말씀]

 

 

주님을 따르는 길은 십자가의 길

  세례를 받은 지 일 년 정도 지난 신자들의 피정모임이 있었습니다. 생활 나눔 중 어느 신자 분이 들려준 이야기입니다.

  “저는 처음에 세례성사를 받고 신자가 되면 세상의 모든 고통과 어려움이 없어질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아니 없어지지 않더라도 적어도 가벼워질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오히려 그 반대였습니다. 하느님을 믿는 것이 때로는 그전보다 내 삶을 더 고통스럽고 힘들게 만들었습니다. 특히 과거에는 의식도 못하고 지나갔던 행동들이 심한 죄책감으로 느껴지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그 모든 것이 하느님의 은총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제가 느끼는 만큼 죄를 조심하게 되었고, 신앙의 삶이 어려워도 마음의 기쁨과 평화를 느낄 수 있습니다. 왜 신앙의 길이 십자가의 길인지 조금은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루카 9,23)

  예수님은 오늘 복음에서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자신을 버린다는 것은 자신을 비하하거나 혐오하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자신의 삶을 선택하는 자기 결단이며, 삶의 실현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데 마지막 걸림돌은 바로 ‘나 자신’입니다. 재물이나 명예를 버리기도 목숨처럼 아깝지만, 나 자신을 버린다는 것은 더욱 어렵습니다. 이웃 사랑을 실천하고 봉사활동에 열심히 한다 하더라도 나 자신을 버리지 못한다면 자기만족이나, 위선된 행동이 될 수도 있습니다. 나 자신의 욕심이나 집착 등은 어쩌면 가장 극복하기 힘든 삶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늘 선택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선택은 늘 하느님과 나 사이에서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자신을 버리라고 단호하게 말씀하신 것이 아닐까요.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자신을 포기해야 합니다. 결국 주님을 위해 자기를 버린다는 것은 자신의 삶에서 주님의 뜻을 우선시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자유의지로 하느님의 뜻을 따르고 실천하겠다는 다짐입니다. 따라서 주님을 따르는 것 자체가 이미 십자가를 각오한 셈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매일의 삶 속에서 구현해야하는 그리스도인들의 지침도 주십니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것이다.” (루카 9,24) 하느님의 뜻을 따르면 결국 나 자신에게 이익이 됩니다. 그러나 그전에 세상 속에서 고통과 수난의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인간의 눈에는 당장 어리석게 보일지라도 하느님의 뜻을 위해 자신을 버리는 행위가 결국 생명에 이르는 길이 됩니다.

  누군가 나에게 “당신은 왜 어리석은 바보처럼 십자가를 지고 갑니까?”라고 물으면 대답합시다. “나를 너무 사랑하셔서 나를 위해 죽기까지 하신 예수님에 대한 나의 믿음 때문입니다.”이라고 말입니다.

허영엽 마티아 신부
교구장 비서실 수석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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